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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MANG 에서 다루는 오늘의 인물 "정윤희" 님을 소개합니다.
NOMANG ISSUE
정윤희
정윤희
丁允姬 | Jung Yoon-hee |
|
출생
|
1954년 6월 4일 (67세)
|
경상남도 통영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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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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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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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cm, 48kg, O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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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남편 조규영, 자녀 2남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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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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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국민학교 (졸업)
혜화여자중학교 (졸업) 혜화여자고등학교 (졸업) |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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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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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사
|
무소속
|
데뷔
|
1975년 영화 '욕망'
|
1. 개요
대한민국의 여배우로 장미희, 유지인과 더불어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다른 트로이카 일원보다도 외모면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1970년대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녀로도 유명하다.
트로이카 중 가장 아름다운 외모로 당시 많은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렇다보니 관능적인 배역을 맡는 일이 많아 반 섹스심벌 정도로 대우하는 일이 흔했다.
남성팬들 사이에서는 유지인과 더불어 '누가 더 미인인가'라는 주제로 설전을 자주 벌이곤 했다.
전성기 시절 상대배우로 출연했던 남자배우들의 인터뷰나 증언을 봐도, 정윤희를 회고할때 '외모가 굉장히 예뻤다'는 언급을 빼놓지 않는다.
한 원로 카메라맨은 ‘여배우는 어디 한 군데쯤은 흠이 있는데 정윤희는 아무데나 갖다 놓아도 화면에 완벽하게 나온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다른 트로이카 일원보다도 외모면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1970년대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녀로도 유명하다.
트로이카 중 가장 아름다운 외모로 당시 많은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렇다보니 관능적인 배역을 맡는 일이 많아 반 섹스심벌 정도로 대우하는 일이 흔했다.
남성팬들 사이에서는 유지인과 더불어 '누가 더 미인인가'라는 주제로 설전을 자주 벌이곤 했다.
전성기 시절 상대배우로 출연했던 남자배우들의 인터뷰나 증언을 봐도, 정윤희를 회고할때 '외모가 굉장히 예뻤다'는 언급을 빼놓지 않는다.
한 원로 카메라맨은 ‘여배우는 어디 한 군데쯤은 흠이 있는데 정윤희는 아무데나 갖다 놓아도 화면에 완벽하게 나온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2. 유년기
1954년생으로 경상남도 충무시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으로 이사를 가서 그 곳에서 초중고 시절을 보냈다.
혜화여고 시절 정윤희는 외모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다음은 정윤희와 유년기를 보낸 친구의 회고.
때는 1970년대 초반 부산의 어느 빵집, 당시는 고교생들의 빵집 미팅이 유행하던 시절이었고 까까머리 남고생이었던 그 시절의 난 우리학교 친구들과 함께 혜화여고 여학생들과의 단체미팅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지금처럼 남녀관계가 편하고 자유로운 시절이 아니라서 수줍어하며 긴장감에 연신 우유만 들이키고 있는데 어느 순간 내 눈을 놀라게 만드는 상황이 펼쳐졌다.
자리에 먼저 나온 여학생들은 인물이 그닥 아니어서 친구들과 실망감의 눈빛을 주고받고 있는데 눈이 튀어나올만한 여학생 하나가 등장한 것.
그녀가 빵집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와 친구들은 전기에 감전된 듯 경악했다.
빵가게 주인과 다른 손님들 시선도 일제히 그 여학생에게로 쏠리며 놀라는 눈치였다.
그 때 '세상에 저렇게 예쁜 여자가 있다니!' 하면서 날 놀라게 만든 여학생이 바로 훗날 영화배우가 된 정윤희, 당시 혜화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인 여학생이었다.
당시 정윤희는 키는 작았지만 유난히 작은 얼굴과 약간 까무잡잡하고 탄력 넘치는 고운 피부를 지녔고 인형처럼 예쁜 얼굴에 유난히 큰 눈과 맑고 까만 눈동자 그리고 속삭이는듯 붉고 도톰한 앵두같은 입술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아름다운 여인의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하늘에서 별이 내려와 앉는다'는 외국 시인의 구절이 문득 떠오른 순간 얼굴도 얼굴이지만 각선미가 유난히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시 여자들은 무다리가 많았는데 정윤희는 교복치마 밑으로 곧게 뻗은 종아리를 지녔고 내가 살면서 지금 현재까지 정윤희의 각선미를 능가하는 여자다리를 본 적이 없다.
지금도 수십년 전 보았던 너무나도 예뻤던 단발머리 여고생 정윤희의 모습을 어제처럼 생생히 기억하며 그녀보다 아름다운 여자를 여태 이 땅에서 본 경험이 없을만큼 너무나도 황홀한 아름다움이었다.
정윤희의 어릴 때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그래서 고교 졸업 후 친구와 같이 대학 응시를 했다.
그러나 친구는 S대 음대에 붙었지만 정윤희는 떨어졌다고.
그 친구에게 경쟁심을 가진 정윤희는 그 친구의 1년 후배가 되기 싫어 미술로 전공을 바꾸었다.
주로 명동 일대에서 활동하며 서울 말씨를 익혔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정윤희는 부산 미니스커트충무시 의문의 1패로 불리며 그 일대에서 외모로 유명했다고 한다.
미술을 지망했던 정윤희였지만 당시 생활비가 부족했고, 또 그녀의 외모가 전국구임을 알게 된 정윤희는 배우로 장래희망을 바꾼다.
그래서 그녀가 첫번째로 오디션에 응시한 영화가 1974년 최고 흥행 영화로 유명한 별들의 고향.
그러나 배우 경험이 없던 정윤희였기에 여주인공 심사에서 탈락하게 된다.
별들의 고향은 정윤희 대신 안인숙이 여주인공 자리를 꿰차게 된다.
유년기에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으로 이사를 가서 그 곳에서 초중고 시절을 보냈다.
혜화여고 시절 정윤희는 외모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다음은 정윤희와 유년기를 보낸 친구의 회고.
때는 1970년대 초반 부산의 어느 빵집, 당시는 고교생들의 빵집 미팅이 유행하던 시절이었고 까까머리 남고생이었던 그 시절의 난 우리학교 친구들과 함께 혜화여고 여학생들과의 단체미팅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지금처럼 남녀관계가 편하고 자유로운 시절이 아니라서 수줍어하며 긴장감에 연신 우유만 들이키고 있는데 어느 순간 내 눈을 놀라게 만드는 상황이 펼쳐졌다.
자리에 먼저 나온 여학생들은 인물이 그닥 아니어서 친구들과 실망감의 눈빛을 주고받고 있는데 눈이 튀어나올만한 여학생 하나가 등장한 것.
그녀가 빵집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와 친구들은 전기에 감전된 듯 경악했다.
빵가게 주인과 다른 손님들 시선도 일제히 그 여학생에게로 쏠리며 놀라는 눈치였다.
그 때 '세상에 저렇게 예쁜 여자가 있다니!' 하면서 날 놀라게 만든 여학생이 바로 훗날 영화배우가 된 정윤희, 당시 혜화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인 여학생이었다.
당시 정윤희는 키는 작았지만 유난히 작은 얼굴과 약간 까무잡잡하고 탄력 넘치는 고운 피부를 지녔고 인형처럼 예쁜 얼굴에 유난히 큰 눈과 맑고 까만 눈동자 그리고 속삭이는듯 붉고 도톰한 앵두같은 입술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아름다운 여인의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하늘에서 별이 내려와 앉는다'는 외국 시인의 구절이 문득 떠오른 순간 얼굴도 얼굴이지만 각선미가 유난히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시 여자들은 무다리가 많았는데 정윤희는 교복치마 밑으로 곧게 뻗은 종아리를 지녔고 내가 살면서 지금 현재까지 정윤희의 각선미를 능가하는 여자다리를 본 적이 없다.
지금도 수십년 전 보았던 너무나도 예뻤던 단발머리 여고생 정윤희의 모습을 어제처럼 생생히 기억하며 그녀보다 아름다운 여자를 여태 이 땅에서 본 경험이 없을만큼 너무나도 황홀한 아름다움이었다.
정윤희의 어릴 때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그래서 고교 졸업 후 친구와 같이 대학 응시를 했다.
그러나 친구는 S대 음대에 붙었지만 정윤희는 떨어졌다고.
그 친구에게 경쟁심을 가진 정윤희는 그 친구의 1년 후배가 되기 싫어 미술로 전공을 바꾸었다.
주로 명동 일대에서 활동하며 서울 말씨를 익혔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정윤희는 부산 미니스커트충무시 의문의 1패로 불리며 그 일대에서 외모로 유명했다고 한다.
미술을 지망했던 정윤희였지만 당시 생활비가 부족했고, 또 그녀의 외모가 전국구임을 알게 된 정윤희는 배우로 장래희망을 바꾼다.
그래서 그녀가 첫번째로 오디션에 응시한 영화가 1974년 최고 흥행 영화로 유명한 별들의 고향.
그러나 배우 경험이 없던 정윤희였기에 여주인공 심사에서 탈락하게 된다.
별들의 고향은 정윤희 대신 안인숙이 여주인공 자리를 꿰차게 된다.
3. 연예계 활동
1975년 영화 욕망으로 데뷔했다.
원래는 1974년에 바보들의 행진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데뷔할 예정이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영화 출연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데뷔작인 욕망은 데뷔작이라고는 하지만 영화 크레딧에 정윤희의 이름도 빠져있고 흥행조차 실패하며 또 하나의 무명 여배우로 남나 싶었으나.
정윤희는 2번째로 영화 출연 기회를 맞이한다.
김지미, 윤정희가 거쳐 간 청춘극장의 주연으로 출연한 것이다.
원래 신인 여배우 강경희가 맡기로 한 자리였으나 강경희가 박동명 사건에 연루되어 그 자리에 정윤희가 대신 들어간 것이었다.
비록 청춘극장은 거하게 실패해 버렸지만, 이전의 유명 여배우였던 김지미, 윤정희가 맡았던 배역을 맡았다는 점으로 인해 그녀의 지명도 상승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
그리고 동시기에 해태제과의 전속모델이었던 양정화도 박동명 사건에 휘말리며 계약이 파기당했는데 정윤희가 이 해태제과의 모델 자리를 차지하며 그녀의 얼굴이 더욱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
예시 광고(바밤바).
박동명 사건으로 인해 얻은 반사혜택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청춘극장으로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은 것뿐만이 아니라 당시 거대 방송사였던 동양방송과 전속 계약을 맺어 활약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이후 정윤희는 동양방송의 인기프로그램인 쇼쇼쇼의 2대 MC를 맡아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때 당시 더블 MC였는데, 정윤희의 파트너는 동양방송 전속가수였던 위키리(본명 이한필)였다.
그리고 마침내 1977년 장미희와 함께 주연을 맡은 드라마 ‘청실홍실’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정윤희는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청실홍실에서 정윤희는 부잣집 여대생역을 맡아서 여주인공 장미희와 삼각관계를 이루는데 드라마에 나온 정윤희의 세련된 외모가 주목받으면서 그 해에 가장 예쁜 연예인으로 선정되었다.
TBC 드라마 '청실홍실' (1977)한편, 영화에서는 얄개 시리즈에서 나두수의 누나인 나두주 역으로 출연하며 우스꽝스런 이미지를 소화한다.
나두수가 나두주의 얼굴에 낙서한 장면이 유명하다.
1978년에는 당시 붐을 이루던 호스티스 소재 영화인 나는 77번 아가씨의 주연을 맡아 정윤희의 벗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던 남자들의 기대감 속에 흥행 성공을 이끌어냈고, 이때부터 여배우 트로이카의 1인으로 영화계에서도 자리를 잡았다.
같은 해, 가수로 데뷔하여 앨범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무렵까지만 해도 연기력이 부족하다고 까이기도 종종 까였으며, 그 때문에 ‘말뚝’이라는 굴욕적인 별명이 붙기도 했다.
당시 정윤희는 연기력으로 주목받던 장미희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졌다고 한다.
1979년에는 유지인과 더불어 영화 실적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녀는 죽음보다 깊은 잠, 도시의 사냥꾼, 사랑이 깊어질 때, 가을비 우산속에, 우요일, 꽃순이를 아시나요에 출연했고 이 중에서 사랑이 깊어질 때랑 우요일을 제외하고 무려 1년 만에 4편의 영화를 성공시키는 저력을 보여줬다.
이러한 기록은 지금도 보기가 힘들다.
한편, 같은 해인 1979년에 '야, 곰례야' 등 동양방송 드라마들의 주연을 맡아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서 정윤희는 순박한 시골 처녀역을 소화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 MBC로도 출연 범위를 넓히며 드라마에서도 계속 활동을 하는 한편 노출 빈도가 있는 호스티스 소재 영화들부터 ‘사랑하는 사람아’ 같은 멜로물을 오가며 계속 해서 인기 스타로 군림했다.
특히, 1981년에 프리랜서 선언을 하며 동양방송을 이은 KBS에서 MBC로 정윤희가 드라마 출연 범위를 넓힌 일은, 그때까지 공고히 유지되고 있던 방송사 전속 탤런트 제도가 붕괴되는 시초가 되었다.
1981년에는 정진우 감독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에서 자신만의 매력을 영화에 가득 표현해 내는 한편 여우주연상까지 타내며 연기력 면에서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후 비슷하게 토속적인 주제를 다룬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로 또 다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레전드가 된 영화 속 한 장면1982년에 성공한 영화로는 여자의 함정이 있다.
애마부인 다음으로 흥행한 영화로 알려져 있다.
연속극에서는 코믹연속극 세자매의 막내딸로 출연하여 정동환과 호흡을 맞추었다.
연속극 고백에서는 기존의 연약한 여성상이 아닌 강한 여성상을 보여줬다.
드라마에선 발랄한 젊은 여성 역을 맡은 일이 많았으며 CF쪽의 이미지도 이런 드라마쪽 이미지의 연장선상에 있다.
한편 정석적인 최루성 멜로물의 여주인공 역도 자주 맡았다.
한데 영화 쪽에선 남자들의 정복욕을 자극하는 역할이라 해야할지, 미모 자체가 죄가 되어 주변 남자들에게 성적인 대상이 되어 휘둘리며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되는 역을 맡은 일이 많다.
70년대 후반부터는 당시 영화계 분위기가 노출 장면이 빠지지 않던 분위기여서 출연한 영화에서 노출 장면을 보인 일도 자주 있다.
원래는 1974년에 바보들의 행진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데뷔할 예정이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영화 출연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데뷔작인 욕망은 데뷔작이라고는 하지만 영화 크레딧에 정윤희의 이름도 빠져있고 흥행조차 실패하며 또 하나의 무명 여배우로 남나 싶었으나.
정윤희는 2번째로 영화 출연 기회를 맞이한다.
김지미, 윤정희가 거쳐 간 청춘극장의 주연으로 출연한 것이다.
원래 신인 여배우 강경희가 맡기로 한 자리였으나 강경희가 박동명 사건에 연루되어 그 자리에 정윤희가 대신 들어간 것이었다.
비록 청춘극장은 거하게 실패해 버렸지만, 이전의 유명 여배우였던 김지미, 윤정희가 맡았던 배역을 맡았다는 점으로 인해 그녀의 지명도 상승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
그리고 동시기에 해태제과의 전속모델이었던 양정화도 박동명 사건에 휘말리며 계약이 파기당했는데 정윤희가 이 해태제과의 모델 자리를 차지하며 그녀의 얼굴이 더욱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
예시 광고(바밤바).
박동명 사건으로 인해 얻은 반사혜택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청춘극장으로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은 것뿐만이 아니라 당시 거대 방송사였던 동양방송과 전속 계약을 맺어 활약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이후 정윤희는 동양방송의 인기프로그램인 쇼쇼쇼의 2대 MC를 맡아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때 당시 더블 MC였는데, 정윤희의 파트너는 동양방송 전속가수였던 위키리(본명 이한필)였다.
그리고 마침내 1977년 장미희와 함께 주연을 맡은 드라마 ‘청실홍실’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정윤희는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청실홍실에서 정윤희는 부잣집 여대생역을 맡아서 여주인공 장미희와 삼각관계를 이루는데 드라마에 나온 정윤희의 세련된 외모가 주목받으면서 그 해에 가장 예쁜 연예인으로 선정되었다.
TBC 드라마 '청실홍실' (1977)한편, 영화에서는 얄개 시리즈에서 나두수의 누나인 나두주 역으로 출연하며 우스꽝스런 이미지를 소화한다.
나두수가 나두주의 얼굴에 낙서한 장면이 유명하다.
1978년에는 당시 붐을 이루던 호스티스 소재 영화인 나는 77번 아가씨의 주연을 맡아 정윤희의 벗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던 남자들의 기대감 속에 흥행 성공을 이끌어냈고, 이때부터 여배우 트로이카의 1인으로 영화계에서도 자리를 잡았다.
같은 해, 가수로 데뷔하여 앨범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무렵까지만 해도 연기력이 부족하다고 까이기도 종종 까였으며, 그 때문에 ‘말뚝’이라는 굴욕적인 별명이 붙기도 했다.
당시 정윤희는 연기력으로 주목받던 장미희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졌다고 한다.
1979년에는 유지인과 더불어 영화 실적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녀는 죽음보다 깊은 잠, 도시의 사냥꾼, 사랑이 깊어질 때, 가을비 우산속에, 우요일, 꽃순이를 아시나요에 출연했고 이 중에서 사랑이 깊어질 때랑 우요일을 제외하고 무려 1년 만에 4편의 영화를 성공시키는 저력을 보여줬다.
이러한 기록은 지금도 보기가 힘들다.
한편, 같은 해인 1979년에 '야, 곰례야' 등 동양방송 드라마들의 주연을 맡아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서 정윤희는 순박한 시골 처녀역을 소화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 MBC로도 출연 범위를 넓히며 드라마에서도 계속 활동을 하는 한편 노출 빈도가 있는 호스티스 소재 영화들부터 ‘사랑하는 사람아’ 같은 멜로물을 오가며 계속 해서 인기 스타로 군림했다.
특히, 1981년에 프리랜서 선언을 하며 동양방송을 이은 KBS에서 MBC로 정윤희가 드라마 출연 범위를 넓힌 일은, 그때까지 공고히 유지되고 있던 방송사 전속 탤런트 제도가 붕괴되는 시초가 되었다.
1981년에는 정진우 감독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에서 자신만의 매력을 영화에 가득 표현해 내는 한편 여우주연상까지 타내며 연기력 면에서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후 비슷하게 토속적인 주제를 다룬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로 또 다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레전드가 된 영화 속 한 장면1982년에 성공한 영화로는 여자의 함정이 있다.
애마부인 다음으로 흥행한 영화로 알려져 있다.
연속극에서는 코믹연속극 세자매의 막내딸로 출연하여 정동환과 호흡을 맞추었다.
연속극 고백에서는 기존의 연약한 여성상이 아닌 강한 여성상을 보여줬다.
드라마에선 발랄한 젊은 여성 역을 맡은 일이 많았으며 CF쪽의 이미지도 이런 드라마쪽 이미지의 연장선상에 있다.
한편 정석적인 최루성 멜로물의 여주인공 역도 자주 맡았다.
한데 영화 쪽에선 남자들의 정복욕을 자극하는 역할이라 해야할지, 미모 자체가 죄가 되어 주변 남자들에게 성적인 대상이 되어 휘둘리며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되는 역을 맡은 일이 많다.
70년대 후반부터는 당시 영화계 분위기가 노출 장면이 빠지지 않던 분위기여서 출연한 영화에서 노출 장면을 보인 일도 자주 있다.
4. 다른 미녀들과의 비교
정윤희의 레전드짤.
꽃순이를 아시나요의 한 장면이다.
예쁜 여자들만 모아놓은 여배우들 중에서도 빼어나게 아름다운 외모 덕에 시대에 기록되는 미녀 여배우가 있다.
정윤희 이전에는 김지미가 있었고, 정윤희 이후에는 원미경, 황신혜, 김희선, 김태희, 한가인, 손예진, 전지현등이 미녀 여배우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정윤희는 해방 이후 현재까지 여배우의 역사를 살펴봐도 이러한 미녀 여배우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여배우이다.
90년대 이후 대중적인 인지도나 드라마에서만 성공한 미녀 여배우로는 김희선, 김태희등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들은 영화 쪽으로는 뚜렷한 성과가 없지만, 정윤희는 영화에서도 성공을 거둔 여배우이다.
거기다가 김태희의 경우에는 전성기 시절에는 인기있는 여배우 중 하나의 위치밖에 오르지 못했고, 그녀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여배우들을 누를 정도의 압도적인 인기를 누린 적은 없다.
이와 반대로 정윤희는 그녀가 활동하던 시절에도 유지인, 장미희가 정윤희의 인기를 많이 위협했지만, 한번 정윤희가 제대로 자리를 잡은 이후에는 인기에서 이 둘을 크게 눌렀다.
임예진 같은 경우는 하이틴 영화에서의 활약은 두드려졌지만 외모면에서도 정윤희와 비교되지 못했고, 무엇보다 임예진은 성인 이후에는 흥행작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정윤희와 비교하기엔 약하다.
이런 정윤희와 비교해서 외모와 인기 모두 높은 평가를 받는 여배우로는 정윤희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유지인이 있었고 정윤희 이후에는 성적면에서 원미경이 영화와 드라마, CF 모두에서 정윤희와 어느 정도 대결을 할 만했다.
꽃순이를 아시나요의 한 장면이다.
예쁜 여자들만 모아놓은 여배우들 중에서도 빼어나게 아름다운 외모 덕에 시대에 기록되는 미녀 여배우가 있다.
정윤희 이전에는 김지미가 있었고, 정윤희 이후에는 원미경, 황신혜, 김희선, 김태희, 한가인, 손예진, 전지현등이 미녀 여배우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정윤희는 해방 이후 현재까지 여배우의 역사를 살펴봐도 이러한 미녀 여배우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여배우이다.
90년대 이후 대중적인 인지도나 드라마에서만 성공한 미녀 여배우로는 김희선, 김태희등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들은 영화 쪽으로는 뚜렷한 성과가 없지만, 정윤희는 영화에서도 성공을 거둔 여배우이다.
거기다가 김태희의 경우에는 전성기 시절에는 인기있는 여배우 중 하나의 위치밖에 오르지 못했고, 그녀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여배우들을 누를 정도의 압도적인 인기를 누린 적은 없다.
이와 반대로 정윤희는 그녀가 활동하던 시절에도 유지인, 장미희가 정윤희의 인기를 많이 위협했지만, 한번 정윤희가 제대로 자리를 잡은 이후에는 인기에서 이 둘을 크게 눌렀다.
임예진 같은 경우는 하이틴 영화에서의 활약은 두드려졌지만 외모면에서도 정윤희와 비교되지 못했고, 무엇보다 임예진은 성인 이후에는 흥행작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정윤희와 비교하기엔 약하다.
이런 정윤희와 비교해서 외모와 인기 모두 높은 평가를 받는 여배우로는 정윤희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유지인이 있었고 정윤희 이후에는 성적면에서 원미경이 영화와 드라마, CF 모두에서 정윤희와 어느 정도 대결을 할 만했다.
5. 은퇴
1984년 중앙건설 조규영 회장과 결혼하면서 은퇴하였다.
조 회장은 유부남이라 불륜인데, 당시 부인이 간통죄로 고소해서 처벌받았다.
그 이후(1984년 12월) 회장이 전 부인과 갈라서고, 정윤희와 재혼했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복잡한 사연이 있는데,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검색해 보면 당시 기사들이 나와 있다.
조 회장은 이미 부인과 불화하여 별거하고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 상태라 주장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83년 4월부터 정윤희를 만나 왔다는 전처의 주장과는 달리, 조 회장은 같은 해 10월 이후에야 정윤희를 만났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10월은 조 회장이 부인과 별거한 시점을 말한다.
즉, 결혼 생활 파탄은 정윤희와는 무관하다는 것.
정윤희 또한 같은 해 12월에 조 회장을 처음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주장했다.
또한 실제 통정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도 논란이 되었다.
원래 간통죄는 현장 증거가 있어야 고소가 가능하므로, 전 부인은 정윤희의 집에 자신의 남편이 있는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증거로 제출하긴 했는데, 둘이 잠옷 차림이긴 했지만, 남녀 단 둘이 있는 현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가정부, 매니저, 조카, 운전사)도 함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정윤희 측에서는 통정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기사지금처럼 과학 수사 기법이 도입된 시절도 아니라서 DNA 증거 확보는 불가능했다.
한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가 아닌 다른 언론사에서 서비스한 기사나 블로그 등에 나온 이야기는 또 다르다.
예를 들면 어떤 기사에서는 조용하게 인터뷰에 임했다고 나온 반면, 어떤 기사에서는 기자의 뺨을 올려붙였다고 나온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는 현재 경향신문, 매일경제, 동아일보, 한겨레, 조선일보만 기사 서비스를 하기 때문에 다른 메이저급 언론사 기사는 찾을 수 없는 데다가, 저 시절 기사들의 특성상 사실 확인이 어려운 부분이 많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연예계 기사는 아님 말고식 보도가 더 심했다.
물론 이 경우는 대기업 사장인 정윤희의 현 남편이 언플을 했을 수도 있으나, 정윤희 남편의 전처 또한 대단한 집안의 자녀라서 맞언플을 했다는 주장도 있기 때문에 교차 검증을 해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양육비를 조건으로 위자료를 더욱 많이 받아냈다는 기사 내용과는 달리, 어찌된 일인지 전처네 자녀들을 정윤희가 길렀다.
당시 자녀들의 나이가 1~2세 정도였기 때문에 사실상 거의 처음부터 정윤희가 다 키웠다.
이 때문에 당시 주부층에서도 정윤희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결혼과 동시에 연예계를 완전히 떠난 채 방송 출연을 한사코 거절해왔으나, 1993년 남편 회사 중앙산업의 가구 브랜드 '하이츠'의 TV광고 모델로 활동한 적 있다.
이때 전성기에서 10년정도 지났지만 여전히 미모를 자랑한다.
54세 때의 정윤희.
2011년 친아들의 약물중독으로 인한 심정지 사망으로 화제가 되어 뉴스에 오르면서 다시 주목받았고, 언론의 추적을 받았다.
집안 사업도 어려워졌는지 서울의 26억 상당의 집이 경매에 붙여지고 현재는 경기도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고 한다.
그해 9월 13일 MBC에서 추석특집 프로그램 <카페 정윤희>가 방영될 당시 팬들은 그녀의 출연을 기대했으나, 결국 모습을 안 드러내고 편지와 꽃으로 대신했다.
2013년 나이 60이 된 정윤희의 근황이 포착되었다.
원래는 동영상이지만 동영상 가져오기 불가로 사진만 가져왔다.
일반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수수한 옷차림으로 입고 다닌다고.
그런데 결혼 초창기에는 경제 관념이 없어서 막 쓰기만 했다가 시가(媤家) 식구들한테서 혼나기도 했다고 한다.
또 다른 비교적 최근의 사진.
위 사진과는 다르게 옛날 모습을 상당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상당한 동안이다.
조 회장은 유부남이라 불륜인데, 당시 부인이 간통죄로 고소해서 처벌받았다.
그 이후(1984년 12월) 회장이 전 부인과 갈라서고, 정윤희와 재혼했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복잡한 사연이 있는데,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검색해 보면 당시 기사들이 나와 있다.
조 회장은 이미 부인과 불화하여 별거하고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 상태라 주장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83년 4월부터 정윤희를 만나 왔다는 전처의 주장과는 달리, 조 회장은 같은 해 10월 이후에야 정윤희를 만났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10월은 조 회장이 부인과 별거한 시점을 말한다.
즉, 결혼 생활 파탄은 정윤희와는 무관하다는 것.
정윤희 또한 같은 해 12월에 조 회장을 처음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주장했다.
또한 실제 통정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도 논란이 되었다.
원래 간통죄는 현장 증거가 있어야 고소가 가능하므로, 전 부인은 정윤희의 집에 자신의 남편이 있는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증거로 제출하긴 했는데, 둘이 잠옷 차림이긴 했지만, 남녀 단 둘이 있는 현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가정부, 매니저, 조카, 운전사)도 함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정윤희 측에서는 통정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기사지금처럼 과학 수사 기법이 도입된 시절도 아니라서 DNA 증거 확보는 불가능했다.
한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가 아닌 다른 언론사에서 서비스한 기사나 블로그 등에 나온 이야기는 또 다르다.
예를 들면 어떤 기사에서는 조용하게 인터뷰에 임했다고 나온 반면, 어떤 기사에서는 기자의 뺨을 올려붙였다고 나온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는 현재 경향신문, 매일경제, 동아일보, 한겨레, 조선일보만 기사 서비스를 하기 때문에 다른 메이저급 언론사 기사는 찾을 수 없는 데다가, 저 시절 기사들의 특성상 사실 확인이 어려운 부분이 많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연예계 기사는 아님 말고식 보도가 더 심했다.
물론 이 경우는 대기업 사장인 정윤희의 현 남편이 언플을 했을 수도 있으나, 정윤희 남편의 전처 또한 대단한 집안의 자녀라서 맞언플을 했다는 주장도 있기 때문에 교차 검증을 해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양육비를 조건으로 위자료를 더욱 많이 받아냈다는 기사 내용과는 달리, 어찌된 일인지 전처네 자녀들을 정윤희가 길렀다.
당시 자녀들의 나이가 1~2세 정도였기 때문에 사실상 거의 처음부터 정윤희가 다 키웠다.
이 때문에 당시 주부층에서도 정윤희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결혼과 동시에 연예계를 완전히 떠난 채 방송 출연을 한사코 거절해왔으나, 1993년 남편 회사 중앙산업의 가구 브랜드 '하이츠'의 TV광고 모델로 활동한 적 있다.
이때 전성기에서 10년정도 지났지만 여전히 미모를 자랑한다.
54세 때의 정윤희.
2011년 친아들의 약물중독으로 인한 심정지 사망으로 화제가 되어 뉴스에 오르면서 다시 주목받았고, 언론의 추적을 받았다.
집안 사업도 어려워졌는지 서울의 26억 상당의 집이 경매에 붙여지고 현재는 경기도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고 한다.
그해 9월 13일 MBC에서 추석특집 프로그램 <카페 정윤희>가 방영될 당시 팬들은 그녀의 출연을 기대했으나, 결국 모습을 안 드러내고 편지와 꽃으로 대신했다.
2013년 나이 60이 된 정윤희의 근황이 포착되었다.
원래는 동영상이지만 동영상 가져오기 불가로 사진만 가져왔다.
일반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수수한 옷차림으로 입고 다닌다고.
그런데 결혼 초창기에는 경제 관념이 없어서 막 쓰기만 했다가 시가(媤家) 식구들한테서 혼나기도 했다고 한다.
또 다른 비교적 최근의 사진.
위 사진과는 다르게 옛날 모습을 상당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상당한 동안이다.
6. 여담
- 단군 이래 최고의 미녀라는 말도 종종 들었고, 해외에도 유명해서 그녀가 일본에 갔을 때는 일본 영화인 한 사람이 '일본 일류 여배우 100명을 합쳐도 정윤희의 매력엔 못 당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 언론에서 수애를 정윤희와 비교하는 기사를 종종 올리고는 한다. 한때는 수애가 정윤희의 딸이라는 루머가 떠돌았다고 한다. 그 외에 박진영이 수지를 보면서 정윤희를 떠올렸다는데...
- 이런 류의 여배우들이 으레 그렇듯이 활동 당시에 별의 별 소문이 다 떠돌았다.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건 술집 여자설과 중졸설. 고등학교를 안 마치고 술집을 전전하다 연예계로 데뷔했다는 설이다. 정윤희가 술집 여자역을 많이 맡았기에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윤희는 유지인에게 퀸들의 만남 '대중들에게 잊혀지고 싶다'고 하소연했다고.
- 정윤희의 과거 사진을 보면 특이한 점이 하나 있는데, 긴 생머리로 활약한 적이 없다. 이것도 정윤희의 특색이라면 특색. 아무리 길어도 어깨머리가 끝이고 상당 기간을 단발머리로 활동했다. 사실 정윤희가 전성기로 활동한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에는 여성들 인기 헤어스타일로 펌이 들어간 중단발이 유행이었던 탓도 있다.
- 신성일은 정윤희에게 따귀를 날린 적이 있다. 임진왜란과 계월향에서 신성일과 연기할 때 한 장면을 촬영하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려던 참에 시간이 지체되자, 정윤희는 시간이 늦었으니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 장면을 못 찍으면 영화사가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었고,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제작부장이 정윤희에게 손찌검을 하려 했다. 그러자 신성일이 이를 무마하려고 본인이 나서서 따귀를 때린 것. 제작부장을 막으면 되지, 너도 똑같은 놈 된거잖아 사실 이 당시의 영화판 제작부장은 말 그대로 '깡패'가 많았다.
7. 활동
7.1. 영화
제목
|
관람인원
|
배역
|
상영일자
|
비고
|
욕망
|
8,247명
|
1975.07.26
|
||
청춘극장
|
23,870명
|
오유경 역
|
1975.09.20
|
|
목마와 숙녀
|
26,351명
|
정은 역
|
1976.04.10
|
|
핏줄
|
상영되지 않음
|
1976.10.30
|
||
고교얄개
|
258,978명
|
나두주 역(조연)
|
1977.01.29
|
|
고교 우량아
|
106,402명
|
나두주 역(조연)
|
1977.04.30
|
|
임진란과 계월향
|
상영되지 않음
|
계월향 역
|
1977
|
|
얄개 행진곡
|
147,567명
|
나두주 역(조연)
|
1977.08.19
|
|
나는 77번 아가씨
|
217,249명
|
윤고나 역
|
1978.11.16
|
|
도시의 사냥꾼
|
95,996명
|
승혜 역
|
1979.03.19
|
|
꽃순이를 아시나요
|
216,628명
|
은하 역
|
1979.05.25
|
|
사랑이 깊어질 때
|
17,498명
|
윤고나 역
|
1979.06.15
|
나는 77번 아가씨의 속편
|
가을비 우산속에
|
159,335명
|
선희 역
|
1979.08.13
|
|
죽음보다 깊은 잠
|
101,698명
|
다희 역
|
1979.12.07
|
|
내가 버린 여자 2
|
36,713명
|
현주 역
|
1980.03.28
|
장미희 공동주연
|
우요일
|
24,497명
|
수자 역
|
1980.04.17
|
|
최후의 증인
|
7,424명
|
지혜 역
|
1980.11.15
|
|
강변부인
|
28,632명
|
민희 역
|
1981.01.01
|
|
사랑하는 사람아
|
39,399명
|
영주 역
|
1981.02.27
|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112,241명
|
순이 역
|
1981.03.01
|
|
아가씨 참으세요
|
22,352명
|
진리화 역
|
1981.09.19
|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
169,381명
|
수련 역
|
1981.10.24
|
|
아벤고 공수군단
|
51,359명
|
배수나 역
|
1982.05.01
|
|
여자의 함정
|
190,230명
|
수현 역
|
1982.05.22
|
|
춘희
|
29,995명
|
춘희 역
|
1982.08.26
|
|
여자와 비
|
58,445명
|
연지 역
|
1982.09.04
|
|
진아의 벌레먹은 장미
|
52,760명
|
진아 역
|
1982.10.09
|
|
정부
|
35,431명
|
미연 역
|
1982.12.04
|
|
안개마을
|
23,455명
|
수옥 역
|
1983.02.22
|
|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
27,568명
|
오수미 역
|
1983.04.02
|
나훈아와 주연
|
약속한 여자
|
7,399명
|
지숙 역
|
1983.06.18
|
|
질투
|
12,856명
|
문희 역
|
1983.07.02
|
|
땜장이 아내
|
3,468명
|
숙희 역
|
1983.10.08
|
|
동반자
|
20,432명
|
여인 역
|
1984.03.24
|
|
사랑하는 사람아 2
|
영주 역
|
99,956명
|
1984.04.07
|
|
사랑의 찬가
|
2,963명
|
수빈 역
|
1984.11.17
|
|
사랑하는 사람아 3
|
13,350명
|
영주 역
|
1985.03.03
|
7.2. 드라마
제목
|
배역
|
방영일자
|
방송사
|
비고
|
기타
|
1976년
|
|||||
금요무대 「두남녀」
|
1976.07.16
|
동양방송
|
주간단막극
|
||
금요무대 「산장의 밤」
|
1976.07.16
|
동양방송
|
주간단막극
|
||
맏며느리
|
1976.09.28 ~ 1977.04.01
|
동양방송
|
일일연속극
|
||
1977년
|
|||||
청실홍실
|
주동숙 역
|
1977.04.02 ~ 1977.10.08
|
동양방송
|
주말연속극
|
|
민들레
|
1977.08
|
동양방송
|
|
||
외동딸
|
1977.09.05 ~ 1978.01.13
|
동양방송
|
일일연속극
|
|
|
1978년
|
|||||
추적
|
1978.01.28
|
동양방송
|
|
||
칸나의 뜰
|
1978.03.10 ~ 1978.08.21
|
동양방송
|
금요연속극
|
||
십오야
|
1978.03.17 ~ 1978.07.08
|
동양방송
|
일일연속극
|
||
그리워
|
1978.06.24 ~ 1978.11.05
|
동양방송
|
주말연속극
|
||
하얀날개
|
1978.11.11 ~ 1979.03.10
|
동양방송
|
주말연속극
|
|
|
1979년
|
|||||
금요일의 여자
|
1979.01.19 ~ 1979.02.02
|
동양방송
|
금요연속극
|
|
|
야! 곰례야
|
곰례 역
|
1979.06.18 ~ 1980.05.17
|
동양방송
|
일일연속극
|
|
고독한 관계
|
1979.10.13 ~ 1980.03.16
|
동양방송
|
주말연속극
|
|
|
1980년
|
|||||
동녀 미사/의녀 미사
|
미사
|
1980.03.16 ~ 1980.09.30
|
동양방송
|
일일연속극
|
|
형사
|
1980.07.27
|
동양방송
|
납량특집
|
||
축복
|
1980.09.06 ~ 1980.12.28
|
동양방송
|
주말연속극
|
||
1981년
|
|||||
부부
|
1981.04.01
|
한국방송공사
|
주간단막극
|
||
물망초
|
1981.04.27 ~ 1981.09.11
|
한국방송공사
|
|||
TV문학관 「외톨괴할망」
|
1981.09.12
|
한국방송공사
|
추석 특집
|
||
1982년
|
|||||
고백
|
1982.03.01 ~ 1982.10.01
|
문화방송
|
주말연속극
|
||
TV문학관 「산골나그네」
|
순임 역
|
1982.04.17
|
한국방송공사
|
||
세자매
|
1982.06.28 ~ 1982.12.31
|
한국방송공사
|
일일연속극
|
||
1983년
|
|||||
TV문학관 「마지막겨울」
|
설희 역
|
1983.03.12
|
한국방송공사
|
||
청춘행진곡
|
1983.04.01 ~ 1983.12.25
|
한국방송공사
|
주말연속극
|
||
청춘일기
|
1983.09.26 ~ 1983.10.27
|
한국방송공사
|
아침연속극
|
||
1984년
|
|||||
독립문
|
배정자 역
|
1984.01.01 ~ 1984.12.30
|
한국방송공사
|
주말연속극
|
7.3. 방송
- 1976.01.16: 동양방송 데이트 쇼
- 쇼쇼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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